“퇴직 후 남편과 24시간, 답답해요” 오십 년을 함께한 부부의 새로운 시작

익숙한 듯 낯선 우리

“스님, 남편이 퇴직하고 나서 집이 너무 답답합니다.”

60대 초반의 한 보살님이 법회 후에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삼십 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던 남편분이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 계시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 남편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고, 점심 먹고 나면 또 소파에 앉아 있고… 저녁때도 그 자리에 있어요. 뭐라도 좀 하시면 좋을 텐데, 그냥 TV만 보고 계세요. 같이 있는데도 할 말이 없어요. 이게 맞나 싶습니다.”

그분의 표정에는 미안함과 답답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오십 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 왜 이렇게 불편한지 본인도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 사실 요즘 정말 많이 듣습니다. 퇴직 후 남편과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살게 되면서 겪는 부부들의 고민입니다. 평생을 같은 이불 속에서 잤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불편해지는 걸까요? 오히려 이웃집 아주머니랑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하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한번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부부 사이의 어색함, 그 안에 숨어 있는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고, 불교의 지혜로 어떻게 이 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갑자기 불편해졌을까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돌아왔습니다. 주말에는 피곤해서 쉬거나, 골프 가거나, 친구들 만나거나 했지요. 집에 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잠자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집안일, 자녀 교육, 친정 부모님 돌봄, 자기만의 모임 등으로 하루를 채웠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각자의 삶을 산 겁니다. 저녁 식탁에서 잠깐 마주치고, 주말에 가끔 같이 외출하고, 명절에 함께 친척들 만나는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의 접촉으로도 부부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퇴직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24시간 같은 공간에 있게 됐습니다. 갈 곳이 없으니 남편은 집에 있고, 집은 그동안 아내의 영역이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공간이 된 겁니다.

이건 단순히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게 아닙니다. 서로의 생활 패턴, 습관, 사소한 버릇들이 전부 드러나기 시작한 겁니다.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 가는 소리, 이 닦는 방식, 신문 보는 습관, TV 채널 돌리는 패턴, 점심 뭐 먹을지 물어보는 시간… 이런 것들이 전부 눈에 들어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자기만의 리듬으로 집안일을 하고, 친구들 만나고, 자기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남편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점심은 챙겨줘야 하나, 밥은 차려줘야 하나, 어디 나갈 때 말해야 하나… 이런 고민들이 생깁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겁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입니다.

“당신 요즘 뭐가 재미있어요?” “글쎄… 별로 재미있는 게 없는데…”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묘한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오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막상 이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꿈이 있는지 잘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부부였지만, 서로를 깊이 알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 만든 투명 인간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는 말을 씁니다. 밝지 못함, 제대로 보지 못함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명을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무명은 우리 일상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무명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익숙함 속의 무관심’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방의 작은 표정 변화, 말투, 습관 하나하나가 다 궁금했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럴까?”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끊임없이 관찰하고,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그게 바로 ‘봄(觀)’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됐나요?

“저 사람은 원래 그래.” “저 양반은 맨날 저 모양이야.” “말해봤자 소용없어.”

이렇게 상대를 규정해 버립니다. 더 이상 보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이 돼 버리는 거지요. 익숙함이 만든 무명입니다.

한번은 어떤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매일 보는데 정작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 보지만 제대로 보지 않습니다. 상대의 눈빛, 표정, 걸음걸이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건강이 나빠진 것도, 마음이 외로운 것도, 무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이 과거에 만들어 놓은 이미지만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 지금 이 순간의 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저장된 ‘남편’이라는 개념, ‘아내’라는 이미지만 보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이걸 상(相)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실체가 아닌 우리가 만든 모습, 개념, 판단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요.

그래서 퇴직 후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불편해집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와 실제 눈앞의 사람이 계속 어긋나니까요.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고, 내 예상과 다르게 말하니까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짜증이 나고 답답해집니다.

“왜 저 양반은 맨날 저 모양이야?”

하지만 진짜 문제는 저 양반이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시 보기: 처음처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다시 보는 겁니다. 처음 보듯이 보는 겁니다.

불교 수행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기대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를 보기. 이걸 정념(正念), 바른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 이걸 적용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아침에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 “또 저러고 있네” 하고 넘어가지 말고, 정말로 그 모습을 보는 겁니다.

표정은 어떤가요? 편안해 보이나요, 무료해 보이나요,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나요? 몸은 건강해 보이나요? 어깨가 축 처진 건 아닌가요? 손은 어디에 있나요? 무심코 무릎을 두드리고 있진 않나요?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투명 인간이었던 사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저 사람도 나름 불편하겠구나.” “갈 곳이 없어서 답답하겠구나.” “나한테 뭐라고 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네.”

이런 마음이 들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짜증이 아니라 연민이 생깁니다. 비난이 아니라 이해가 생깁니다.

한 할머니가 이런 경험을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퇴직 후 집에서 심심해하는 모습이 너무 답답해서, 그냥 밖에 나가라고 짜증을 부렸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남편을 유심히 봤답니다.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을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 신문을 보다가 한숨 쉬는 모습,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 그 모습들이 갑자기 낯설고 또 처연하게 느껴졌답니다.

“아, 이 사람도 힘들구나. 평생 회사가 삶의 전부였는데, 갑자기 빈손이 된 거구나. 나도 답답하지만, 이 사람은 얼마나 막막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부드러워졌답니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남편한테 물어봤답니다.

“당신, 요즘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남편이 처음엔 무뚝뚝하게 “괜찮다”고 했지만, 조금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하더랍니다.

“솔직히… 좀 그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한마디에 할머니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답니다. 오십 년을 같이 살았는데, 상대방이 힘들어한다는 걸 이제야 안 거지요.

자애명상: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어렵다

불교에는 자애명상(慈愛冥想)이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보내는 명상입니다.

전통적인 자애명상은 이런 순서로 진행됩니다.

먼저 나 자신에게 자애를 보냅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평안하기를. 내가 건강하기를.”

그다음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자애를 보냅니다. 부모님, 스승님 같은 분들이지요.

그다음은 좋아하는 사람, 친한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중립적인 사람, 즉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애를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단계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자애를 보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순서를 실천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오히려 낯선 사람한테 자애를 보내는 게 더 쉽다는 겁니다. 길에서 마주친 아줌마, 슈퍼 계산대 직원, 택시 기사님… 이런 분들한테는 “행복하십시오” 하는 마음이 비교적 쉽게 듭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 배우자한테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 많은 기대와 실망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상처와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함이 만든 무감각 때문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교회 나가는 집사님들한테는 웃으면서 인사하는데, 집에 들어와서 마누라한테는 인상 쓰고 짜증부터 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정말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이렇습니다. 밖에서는 친절하고 상냥한데,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는 거칩니다.

그래서 자애명상이 꼭 필요합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는요.

매일 아침이나 저녁, 짧은 시간이라도 앉아서 배우자를 떠올리며 이렇게 마음을 내보는 겁니다.

“저 사람이 행복하기를. 저 사람이 평안하기를. 저 사람이 건강하기를. 저 사람이 편안하기를.”

처음에는 말로만 하게 됩니다. 진심이 안 느껴집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계속하십시오.

매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걸 느낄 겁니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봐도, 예전처럼 답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저 사람도 나름 편하게 있구나” 하는 여유가 생깁니다.

아내가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봐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고맙구나”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자애명상은 상대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겁니다. 상대를 보는 내 눈을 바꾸는 겁니다.

각자의 공간, 각자의 시간

불교에서는 집착을 버리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오해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집착을 버린다는 건,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퇴직 후 부부 사이가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집에서 뭐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운동이라도 하든지, 취미생활이라도 하든지, 봉사활동이라도 나가든지… 그냥 소파에 앉아만 있으면 답답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권하고, 때로는 다그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불편합니다. 평생 회사에서 이래라저래라 듣고 살았는데, 이제 집에서까지 지시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좀 쉬고 싶은데, 자꾸 뭐 하라고 하니 짜증이 납니다.

양쪽 다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둘 다 불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로의 공간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마음의 공간, 시간의 공간을 말합니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있고 싶다면, 그냥 두십시오. 그게 그 사람이 지금 편한 방식입니다. 물론 건강 생각하면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필요성을 느껴야 합니다.

대신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 시간을 가지십시오. 친구들 만나고, 취미생활 하고, 봉사활동 나가십시오. 남편이 집에 있다고 해서 같이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자기 할 일을 하는 걸 간섭하지 마십시오. 친구들 만난다고, 성당 나간다고, 요가 배운다고 뭐라 하지 마십시오. 그게 그 사람한테 필요한 시간입니다.

어떤 부부는 이런 식으로 합의를 했답니다.

“주 3일은 각자 따로 지내기. 서로 어디 가든 간섭하지 않기.”

그랬더니 오히려 관계가 좋아졌답니다. 매일 붙어 있으니까 답답했는데, 각자 시간을 갖고 나니 만났을 때 할 이야기가 생기더랍니다. 어디 갔다 왔는지, 뭘 했는지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대화가 늘어나더랍니다.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이 바로 이겁니다.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너무 멀어서도 안 됩니다. 적당한 거리,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겁니다.

호주머니 속의 밤송이처럼, 너무 세게 쥐면 서로 찔리고, 너무 느슨하면 떨어집니다. 적당히 감싸 안으면서도 여유를 주는 거리, 그게 중도입니다.

작은 일상의 감사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그것은 바로 ‘함께 있음’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혼자 사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혼자 지내는 분들, 자식들도 다 떠나고 쓸쓸히 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 있고, 밤에 잠들 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홀로 사시는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남편이 밥 달라고 할 때가 그리워요. 짜증났지만, 그게 그리워요. 이제는 밥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그게 사실은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아침에 남편이 “밥 줘” 한마디 하는 것. 아내가 “당신 오늘 뭐 먹고 싶어요?” 물어보는 것. 같이 TV 보며 앉아 있는 것. 밤에 옆에서 코 고는 소리 듣는 것.

이 모든 게 복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늙어간다는 게 복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늙고, 병들고, 결국은 떠나갑니다. 언젠가는 혼자가 됩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도, 나도, 언젠가는 이별해야 합니다.

그걸 안다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됩니다.

매일 아침, 옆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보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당신이 옆에 있네요.”

밤에 잠들기 전, 옆에 누운 사람을 보며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네요.”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답답함이 감사함으로 바뀝니다. 불편함이 소중함으로 바뀝니다.

함께 늙어가는 수행

어떤 노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부로 산다는 것은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거울이 되어 주는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배우자는 내 가장 솔직한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얼마나 무심한지, 얼마나 조급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편하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불편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왜 그런지 알아차리고, 조금씩 변화하는 것. 그게 수행입니다.

퇴직 후 남편과 24시간 함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하고 불편한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참을성을 배웁니다. 이해심을 배웁니다. 내려놓음을 배웁니다. 감사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사랑을 배웁니다.

젊었을 때의 사랑은 열정이었습니다. 설레고, 뜨겁고, 감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은 다릅니다. 잔잔하고, 깊고, 따뜻합니다.

열정은 아니지만 신뢰가 있습니다. 설렘은 없지만 안정이 있습니다.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진실합니다.

오십 년을 함께 산 부부의 사랑은 바로 이런 겁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고, 요란하지 않지만 깊은 사랑입니다.

퇴직 후 함께 하는 시간은, 이 사랑을 더 깊게 만들 기회입니다.

서로를 다시 발견하고, 서로를 다시 이해하고, 서로에게 다시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작은 실천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정리하면서, 오늘부터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루에 한 번 배우자를 정말로 보십시오.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보지 말고, 3분이라도 앉아서 상대방을 유심히 보는 겁니다. 표정, 몸짓, 작은 변화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요즘 건강은 괜찮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마음으로 보십시오.

둘째, 하루에 한 번 자애명상을 하십시오.

길게 할 필요 없습니다. 1분이면 됩니다. 배우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당신이 행복하기를, 평안하기를” 하고 마음을 내보내십시오. 매일 하다 보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셋째,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십시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일주일에 하루라도, 서로 간섭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가고 싶은 곳 가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넷째, 작은 일상에 감사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도 당신이 있네요” 하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밥 먹을 때, “같이 먹으니 좋네요” 하고 말해 보십시오. 처음엔 어색해도 괜찮습니다. 계속하다 보면 진심이 됩니다.

다섯째,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요즘 뭐가 재미있어요?” “어디 가보고 싶은 데 있어요?” “같이 뭐 할까요?”

이런 질문들로 대화를 시작하십시오. 처음엔 어색하고 답이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계속 물어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대화가 늘어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다시 시작하기’

우리는 오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지금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퇴직 후 함께 하는 시간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서로를 다시 알아가고, 다시 사랑하는 시작입니다.

마무리하며

“퇴직 후 남편과 24시간, 답답해요.”

이 말로 시작했던 보살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살님, 답답한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답답함 속에 기회가 있습니다. 오십 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제 진짜 함께 사는 겁니다. 서로를 진짜로 아는 겁니다. 그게 쉽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입니다.”

몇 달 후 그분이 다시 오셨습니다. 표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스님, 그날 말씀대로 남편을 다시 보려고 노력했어요. 처음엔 어색하고 힘들었는데,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여전히 답답할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짜증나지는 않아요.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이셨습니다.

“며칠 전에 남편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 오늘도 우리 같이 있네요. 고마워요.’ 남편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러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나도 그래’라고 하더라고요. 스님, 결혼하고 처음 들어본 말이에요.”

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도, 오늘 저녁 한번 해보십시오.

옆에 있는 사람한테, “당신, 오늘도 우리 같이 있네요. 고마워요.”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쑥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퇴직 후의 시간은 끝이 아닙니다. 함께 늙어가는 것은 짐이 아닙니다. 서로 옆에 있다는 것은 답답함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오십 년을 함께한 부부에게, 이제 시작되는 새로운 이십 년, 삼십 년이 서로에게 진짜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십시오. 평안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함께 계심에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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